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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준이 그리우면 비디오를 틀지요"

“지난 설날, 남준이 꿈에 나타났지요.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쓸고 있었어요. 내가 ‘왜 청소기를 두고 빗자루냐’고 나무랐지요. 남준이 다시 돌아올 것만 같아요. ” 고 백남준씨의 아내 시게코 구보타(73·사진)씨가 9일 뉴욕한국문화원에서 회고록 ‘나의 사랑, 백남준’(구보다 시게코·남정호 지음)의 출판 기념회를 열었다. 이 행사는 백남준씨의 일상을 카메라로 담은 사진작가 이은주씨의 전시회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의 삶과 예술’ 개막일에 맞추어 열린 것. 지난 달 29일은 백씨가 세상을 뜬지 5년째 되는 날이었다. 사진과 글로 회상하는 ‘인간’ 백남준 행사에 그를 기리는 이들이 몰려 들었다. 이 책엔 1964년 가난한 예술가였던 백남준과의 만남에서 2006년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로서 영원히 작별할 때까지 40여년의 공적이며, 사적인 삶이 담겨있다. 공동 저자인 중앙일보 남정호 선임기자는 2006년 뉴욕 특파원으로 구보타씨와 만나 책으로 냈다. 비디오아티스트인 구보타 여사는 백씨의 예술적인 동반자였다. 로댕에게 조각가 아내 카미유 클로델이 있었고, ‘배용준’ 전에 ‘백남준’이 있었다. 일본 니가타에서 태어난 시게코(成子)씨는 도쿄교육대학교에서 조각을 전공한 후 미술교사를 지냈다. 1964년 봄, 그녀는 운명의 한국 남자를 만나게 된다. 도쿄의 소게츠홀에서 신예 예술가 백남준의 공연을 보고 반한 것이었다. “남준은 독일에서 벌써 유명했지요. 정말 미남이었어요. 다시 태어나도 남준과 결혼하겠어요. 저는 쫒아다니는 게 전문이니까요!” 2개월 후 구보타씨는 뉴욕으로 이주, 백남준과 재회하고 전위예술운동인 ‘플럭서스’에 가담한다. 이로부터 열애는 시작됐지만, 백씨는 독신을 고집했다. 후에 구보타씨는 미국인 작곡가와 결혼했다가 이혼, 77년 마침내 백씨와 결혼에 이른다. “남준이 어느 날 매디슨애브뉴의 골동품상회에서 1만달러짜리 불상을 사더군요. 무엇에 쓰려고 비싼 돈을 주고 부처를 사는가 했더니, ‘TV 보는 부처’를 만들었지요!” 남편의 명성에 가려졌지만, 구보타씨는 마르셀 뒤샹의 작품을 비디오아트로 제작한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로 유명해졌다. 그는 2007년 백남준아트센터가 있는 용인의 시장으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았다. “남준이 그리우면 비디오를 봅니다. 그러면, 남준이 여기에 있는 것 같아요. 비디오는 제 2의 현실을 가능케 해주는 예술입니다.” 내달 4일까지 계속되는 전시엔 이은주씨의 딸 최시내씨의 사진전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 강수진’도 소개되고 있다. 212-759-9550. 박숙희 기자 [email protected]

2011-02-09

카메라로 본 애국자, 천재 예술가의 일상

“백남준 선생님은 애국자이셨어요. 한국 신문을 즐겨보시고, 한인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좋아하셨지요. 소호의 스튜디오에서 전자 오르간으로 ‘울 밑에 선 봉선화야’와 ‘신라의 달밤’을 연주하기도 하셨습니다.” 9일부터 3월 4일까지 뉴욕한국문화원에서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의 삶과 예술’을 여는 사진작가 이은주(63·사진)씨는 인간 백남준은 ‘따뜻한 사람’으로도 기억한다. 이씨가 카메라를 들면 백씨는 포즈를 취하며 “나 이쁘게 찍어줘. 그러면 여자들한테 인기가 좋겠지?”라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이씨는 2006년 1월 29일 백씨가 마이애미에서 세상을 등질 때까지 16년간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비디오아트 선구자’의 일상을 카메라에 담아왔다. 그와 백씨의 인연은 1992년 서울 문예회관에서 시작됐다. 예술혼이 여전히 ‘발랄’했던 예순 살의 백남준은 피아노를 부수는 퍼포먼스를 하던 중 무대로 달려드는 취재기자와 사진기자들에게 “당장 내려가라”고 호통을 쳤다. 그 가운데 있던 열혈 사진가 이은주씨는 물러서지 않았고, 무대 뒤로 올라가서 백씨의 모습을 촬영했다. 이것을 계기로 이씨는 백씨의 호텔 비밀번호를 갖고 있는 전속 카메라맨이 된다. “보통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이야기들을 하시곤 했어요.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생각나면 종이에 낙서하듯 스케치도 하셨구요.” 1996년 호암아트 예술상을 받은 후 뉴욕으로 돌아온 백씨는 중풍으로 쓰러졌고, 후엔 당뇨까지 겹치게 된다. 건강했을 때 “예술가가 병 들면 쓸모가 없다. 난 병 들면 안락사가 합법화된 네덜란드로 가겠다”고 말해왔던 거장이었지만, 한국·중국·미국 3개국 병원을 다니며 삶에 대한 애착을 보였다는 것. “2000년 구겐하임뮤지엄 회고전에서 센트럴파크까지 늘어선 관람객들의 긴 줄을 보며 정말 ‘위대한 분’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런 분은 정말 영원히 사셔야 하는데요…” ‘백남준의 삶과 예술’전은 지난해 성남아트센터와 도쿄 한국문화원을 거쳐 뉴욕으로 이어지는 순회전시다. 이번 전시는 백씨의 5주기를 기해 열리는 추모전이기도 하다. 강릉에서 태어나 성균관대 국문과를 다니며 사진서클 활동을 했던 이씨는 81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사진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이후 공연과 인물 사진작가로 활동, 2003년 프레스센터에서 ‘이은주가 만난 108 문화예술인’전을 열었다. 어머니를 따라 공연 전문 사진작가가 된 딸 최시내씨도 이번 전시에 동행한다. 최씨는 ‘슈트트가르트 발레단의 프리마 발레리나 강수진’을 담은 작품을 선보인다. 9일 오후 6시 오프닝 리셉션에선 백씨의 보인 시게코 구보타 여사가 출간한 회고록 ‘나의 사랑 백남준’의 출판 기념회도 겸한다. 212-759-9550. 박숙희 기자 [email protected]

2011-02-07

아직 세계는 잘 모른다, 시대 넘어선 이 '혁명가'를…

많은 사람들이 ‘왜 백남준 작품은 값이 오르지 않는가’라고 묻는다. 또는 ‘어째서 동시대 대가들에 비해 저렴한가’라며 안타까워한다. 백남준은 생전에 이미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준비해놓았다. 그의 문재(文才)를 엿볼 수 있는 1988년 발표 에세이의 한 대목이다. “나는 사유재산 발견 이전의 오래된 과거를 생각하는 걸 좋아한다. 그렇다. 비디오아트는 신석기시대 사람들과 공통점이 있다. 비디오는 누가 독점할 수 없고, 모두가 쉽게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의 공동재산이다. 비디오는 유일한 작품의 독점에 바탕을 둔 체제로 작동하는 (자본주의) 예술세계에서 힘들게 버텨내고 있다. 현금을 내고 사가는 작품, 순전히 과시하고 경쟁하는 작품들로 이루어진 예술세계에서 말이다.” 신랄하면서도 정곡을 찌른 이 발언은 백남준 예술세계의 핵심이다. 그는 자신과 동료들의 작업을 ‘부자 예술의 지배에 대항하는 가난한 예술’이라고 불렀다. 그가 창조한 것은 오늘날 미술시장에서 팔리는 작품이 아니라 ‘인지의 도구’였다. 인간으로 태어나 더 많은 것을 느끼고 즐기고 깨닫는 방편으로서의 예술이었다. 백남준은 “나는 작업할 때 무의식으로 만드는데,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샤먼, 무당”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가 쓰고 말한 것, 행위예술로 보여준 것, 그 과정에서 형태로 고정된 것을 이해하려면 어느 정도의 안내가 필요하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전시기획자인 김승덕씨는 “이른 시일 안에 『백남준 사전』을 만들어야 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고 조언한다. 더욱이 백남준 비디오 아트의 핵심은 ‘피드백(되먹임)’, 즉 반응과 변화다. 에너지를 펌프질해 서로 간에 격렬한 열정을 일으키는 것이다. 우주 폭발 후 1만년 동안 우주비가 내렸다고 하는데 우주 탄생의 광대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 백남준 레이저 아트의 원리이기도 하다. 백남준은 자위행위 같은 현대미술품을 경멸했다. 그는 모든 인간이 함께하는 예술을 꿈꿨다. 그는 『벽암록』에 나오는 이음새의 자리가 없는 알탑인 ‘무봉탑’ 이야기를 무척 좋아했는데 그것이야말로 ‘그늘이 없는 나무 아래 모든 사람이 타고 가는 배’, 바로 자신의 예술 목적지라고 말했다. 백남준은 ‘건너뛰어라’ ‘세계를 축소하라’는 표현을 즐겨 썼다. 그는 이미 1960년대에 팩스, 위성 TV, 초음속 비행기, 달나라로 향하는 우주선들로 좁아지는 세상을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서구 언론이 백남준을 일러 ‘과학자이며 철학자인 동시에 엔지니어인 새로운 예술가 종족의 선구자’라 부른 까닭이다. 그는 혁명가적 기질도 농후해서 “예술에 사보타주(태업)가 있어야 사회는 더 안전하다. 우리(예술가)는 사회의 도화선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영철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은 “백남준의 예술인류학은 지금까지 보여졌던 모든 종류의 현대예술의 개념적 범위를 넘어서는 새로운 시도이자 동시에 미디어 담론을 뛰어 넘는다”고 평가한다. 네트워크화된 사회의 도래를 반세기 전에 예견했을 뿐 아니라 우주 유목 시대에 걸맞은 신개념의 예술적 변형자였다는 것이다. 60년대에 이미 한국이 미디어 강국이 될 것이라 예언한 사람, 90년대부터 미국에서 사용된 정보고속도로라는 용어의 모델을 일찌감치 ‘전자 초고속도로’로 창안한 사람이 그다. 백남준은 오래된 미래였고, 미래의 미래이기에 소중하다. 8일 개관 2주년을 맞는 경기도 용인 백남준아트센터가 하늘나라의 그를 다시 불러내 한바탕 굿을 벌이는 이유다. “나는 무질서한 것들, 놀라움에 관심이 많다”는 40년 전 그의 발언이 지금도 날 것처럼 싱싱하기에 백남준의 정신을 오늘 그의 탄생지에서 발신해 전세계로 뿌리는 것은 남은 자의 할 일이다. 정재숙 선임기자

2010-10-12

'박제된 서구 예술의 죽음' 선포한 그는 시대를 몰고간 '유목민'

‘백남준 전쟁’이라고? 그렇다, 전쟁이다. 그가 일흔네 살의 나이로 ‘아리랑’을 흥얼거리며 ‘엄마’를 웅얼거리다 세상을 떠난 지 4년.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로서 서구 중심의 예술 질서를 교란하려 돌진했던 그의 칭기즈칸 같은 배짱과 뚝심은 뒤에 남은 사람들이 봉기할 것을 촉구한다. 백남준은 21세기 미디어 세상을 내다보고 세계적 비전을 제시한 철학자이자 사상가였다. 그를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쯤으로 한정짓거나, 기인열전의 신화 속에 가두어 두려는 시각을 바로잡으려는 국내외 움직임이 일고 있다. 지금은 문화전쟁 시대. 아시아의 하늘이 천년에 한 번 보내준 백남준의 재평가를 위한 싸움은 시작됐다. 여기 얼굴을 감싸 쥔 한 남자가 있다. 1965년에 쓴 자서전에서 그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예언했다. “20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백 살이 될 것이다. 30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천 살이 될 것이다. 11932년에 내가 여전히 살아있다면 나는 십만 살이 될 것이다.” 이상(李箱)의 시를 연상시키는 이 묵시록과도 같은 글은 우주적 영혼으로 지구를 떠돌았던 그의 장쾌한 행보를 돌아보게 한다. 백남준(1932~2006)은 흔히 ‘한국이 낳은 비디오 아트의 창시자’라 불리지만 이제 그 진부하고도 해묵은 수식어는 버릴 때가 되었다. 지난 11일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 팔라스트’ 미술관에서 막을 올린 ‘백남준 전’은 사후 4년 만에 시작되는 ‘백남준 바로 세우기‘의 팡파르였다. <본지 9월 14일자 26면 참조> 백남준은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일찌감치 일본, 독일 등지로 더 자유로운 예술 형식을 찾아 떠돈 유목민이었다. 음악을 공부하다가 전위예술로 확장한 그의 예술세계는 과학과 자연, 수학과 신비주의 등 학문의 전 영역을 감싸 안고 돌아치는 통섭의 도가니였다. 하지만 그 광활한 정신의 파노라마를 알아본 이는 많지 않았다. 그 외로움, 그 고통, 그 소외를 분출하는 에너지의 행위예술로 돌파하던 그의 초기 독일 시절은 좌충우돌 파격과 잔혹의 연속이었다. 1960년대 초 독일 뒤셀도르프와 쾰른 등지를 무대로 동양에서 온 노란 얼굴의 무명 예술가로 살았을 때 그가 남긴 편지 한 통은 당시의 심정을 해학 속에 버무리고 있다. “비평가는 공연 전에 자리를 떴고, 사진가는 공연 후에 왔습니다. 내 고통이 헛수고였나요? 하 하 하, 진정 난 타락했군요.” 쾰른의 라인강변 린트가세 28번지 건물 꼭대기 다락방은 백남준의 첫 행위예술이 벌어진 곳으로 유명하다. 1960년 10월 6일 마리 바우어마이스터가 자신의 작업실에서 연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구’에서 그는 쇼팽을 연주하다가 머리로 건반을 내리친 뒤 피아노를 넘어뜨리고 선배 전위예술가인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자른다. 단단한 기성체계를 박살내는 것, 수천 년 서구 예술의 우월성을 깨부수는 것, 한마디로 기존 예술의 죽음을 선포하고 더 자유로운 인류 보편의 정신성으로 나아가는 것이 백남준의 꿈이었다. 라인강변 마리의 작업실, 백남준이 비디오 아트를 연구하려 틀어박혔던 주택가 차고 자리를 둘러본 이영철 백남준아트센터 관장은 “그는 자신이 재미있게 본 것들, 자신을 황홀하게 만든 경지를 누구나 함께 볼 수 있도록 고안하기 위해 미친 듯이 일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지식으로 박제된 예술에서 벗어나 인간이 훨씬 더 큰 해방감을 느끼도록, 육신과 정신을 편안하게 놀릴 수 있도록 가로지르는 판을 벌였다는 것이다. 백남준은 스스로 ‘실험 TV’ 보는 법을 이렇게 알려주었다. “눈을 사분의 삼 감으세요. 그리고 30분 이상 보세요.” 그가 가장 혐오했던 것은 뻔한 생각, 지루한 감상이었다. 인간의 사고를 더 널리 뻗어나가게 늘려주고 자극하며 각성시키는 그의 전 작업이 얼마나 중독성이 강한가를 그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는 전시장에서 체험했다. ‘레이저 콘’ 밑에 누운 사람들은 옆에서 기다리건 말건 일어날 줄 모르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빛의 산란 속에서 온 몸을 열어놓고 자신의 존재를 되살피고 있었다. 그런 예술을 인류에 봉헌한 백남준이 이 땅에서 태어났다. ‘우린 백남준의 나라다’라고 외칠 때가 되었다. 뒤셀도르프·쾰른·부퍼탈(독일)=정재숙 선임기자 200 백남준 이해에 도움이 되는 책 10권 ① 벅민스터 풀러 지음, 마리 오 옮김, 앨피 펴냄 『우주선 지구호 사용설명서』 = 우주를 항해하는 지구의 관점에서 인류의 미래를 조망하는 것이 백남준의 ‘텔레-비전’. ② 김호동 지음, 돌베개 펴냄 『몽골제국과 세계사의 탄생』 = 유라시아를 ‘최초의 지구촌’으로 통합시킨 몽골 제국의 ‘초원 고속도로’는 백남준의 ‘전자 초고속도로’의 모델. ③ 브뤼노 라투르 지음, 홍철기 옮김, 갈무리 펴냄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 인간과 비인간(기계·자연·사물)이 대등하게 ‘잡종화된’ 세계에서 근대를 무효화하는 새로운 가능성 제시. ④ 나카자와 신이치 지음, 김옥희 옮김, 동아시아 펴냄 『대칭성 인류학』 = 신화적 세계에서 테크놀로지가 출현하고, 테크놀로지로부터 신화적 상상력이 유발되는 유동적 지성의 엎치락뒤치락 세계. ⑤ 들뢰즈 & 가타리 지음, 김재인 옮김, 새물결 펴냄 『천 개의 고원』 = 왜 늑대와 칭기즈칸과 이동 야금술과 음악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가. ⑥ 김진호 지음, 예리미 펴냄 『음색, 소음, 소리 객체』 = 백남준의 비디오아트에서 구체음악과 전자음악의 기법을 이해하기 위한 입문서. ⑦ 빌렘 플루서 지음, 김현진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 펴냄 『그림의 혁명』 = 커뮤니케이션과 미디어의 급변을 상상적인 그림 코드로 읽어내는 이미지 사유의 세계. ⑧ 앙토냉 아르토 지음, 박형섭 옮김, 현대미학사 펴냄 『잔혹연극론』 = 관객을 해방시키고 신체적 음악의 퍼포먼스를 추구했던 백남준은 아르토를 탐독. ⑨ 안동림 역주, 현암사 펴냄 『벽암록』 = 백남준은 『벽암록』을 주변에 강의해줄 정도로 정통해 있었으며, 1963년 첫 전시에서 “처음에는 섬뜩하다가 문득 시원해졌다”는 ‘돈오’의 방식을 채택. ⑩ 백남준, 에디트 데커·이르멜린 리비어 엮음, 백남준아트센터 펴냄 『백남준: 말馬에서 크리스토까지』 = 백남준이 직접 말하는 ‘백남준 세계’의 모든 것. 정리=김남수 백남준아트센터 총체미디어연구소 연구원

2010-10-12

"영국에선 전체적 삶 조망 독일은 초기 작업에 집중"

범세계주의자인 백남준의 전시는 그의 정신에 걸맞게 영국과 독일 두 나라의 주요 미술관이 손잡고 기획했다. 한국 출신인 이숙경영국 테이트 리버풀 큐레이터와 수잔느 레너트 독일 쿤스트 팔라스트 객원 큐레이터는 백남준이 타계한 뒤 4년 만에 처음 열리는 회고전을 2년 여에 걸쳐 꼼꼼하게 준비한 노력을 인정받았다. - 독일에 비해 그의 비디오 아트에 대한 이해도가 낮은 영국 대중을 대상으로 전시회를 꾸려야 하는 이숙경씨는 고민이 많겠다. “백남준은 1989년 헤이워드 갤러리 개인전이 영국에서 연 유일한 전시였을 만큼 영국 국민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테이트 리버풀 백남준 회고전’(12월 17일~2011년 3월 13일)은 영국 땅에 거의 처음 소개되는 백남준 작품전이다. 음악 공부에서 출발해 비디오 아트, 레이저 아트로 가는 그의 작품 전개 전 과정을 차근차근 설명하는 친절한 전시회가 되도록 꾸밀 예정이다.” -백남준은 독일 곳곳에서 이미 여러 차례 전시회가 열려 대중에게 낯익은 작가였기에 수잔느 레너트의 고민이 더 컸을 텐데. “1960~70년대 초기 작업의 바탕을 보여주는 새 자료를 발굴하고 그 숨겨진 의미를 짚어내는 일에 집중했다. 백남준의 작품 세계는 인문학·음악·과학·신학 등 광범위한 인류 지식 전반에 걸쳐있어서 긴 시간을 두고 그가 남긴 글과 작품을 통섭의 맥을 짚어가며 연구하는 일이 필요하다.” -‘ 아기자기하면서 생각거리가 많은 구성이 관람객을 즐겁게 하고 있다. “한 공간에 다양한 연출로 관람객의 발걸음을 주춤거리게 만드는 ‘부처’ 연작을 눈 여겨 봐 달라.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해주는 색다르고 의미 깊은 체험이 될 것이다.” 뒤셀도르프=정재숙 선임기자

2010-09-16

'예술의 칭기스칸 백남준' 그 떠난 지 벌써 4년 다시 쏟아지는 박수

그는 죽어 땅에 묻혔지만 그의 전위정신과 영혼이 담겨 있는 작품세계에 대한 평가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흔히 ‘비디오 예술의 창시자’라 불리는 백남준(1932~2006)의 사후 첫 번째 대규모 회고전이 11일 독일 뒤셀도르프 ‘쿤스트 팔라스트(예술궁전· www.smkp.de)’ 미술관에서 막을 올렸다. 일반 공개 전날인 10일 오후 8시 시작된 전야제는 밀려드는 관람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을 지경이었다. 1, 2층 전시실은 사람들이 넘쳐 10 여 분씩 줄을 선 뒤 시간차를 두고 입장해야 할 정도였다. 생전에 “나는 황색 재앙이다”라고 선언했을 만큼 동양에서 온 노란 얼굴의 전위예술가로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던 백남준이 타계한 지 4년 만에 부활하고 있다. “분더바(놀라워)!” “다스 이스트 에스(이건 뭔가 특별해).” ‘레이저 콘’ 밑에 누워 작품을 감상하던 독일 관람객들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온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레이저 광선은 보는 이에게 영혼이 씻기는 듯한 독특한 체험을 안겨준다. 매 순간 다른 레이저 비가 폭포수처럼 떨어진다. 아이들처럼 소리를 지르고 맑은 얼굴로 웃음짓는 장년 남녀들이 차례를 기다리며 레이저 광선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TV 부처’ 연작이 오밀조밀 모여 있는 공간은 쉽게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사람들의 진지한 얼굴이 또 하나의 부처 상을 만들고 있다. 1960년대 초기작부터 2001년 말기작까지 백남준의 대표작과 각종 자료를 촘촘하게 늘어놓은 전시장은 21세기 미디어 아트의 도래를 몇 십 년 앞서 일찌감치 내다보고 홀로 전진했던 한 고독한 선지자의 초상을 선명하게 그려냈다. 백남준을 단지 ‘비디오 조각’의 창시자나 수많은 해프닝과 행위예술의 전설적 인물로만 기억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증명하는 연구 자료들이 전시장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서구미술사가 새로운 미디어 예술의 영역으로 큰 발걸음을 옮기게 한 초석을 놓은 백남준을 저평가하거나 외면했던 전문가들의 편견을 깨버릴 수 있는 증거들이다. 이 작품들에 열광하는 관람객들의 열정이 또한 백남준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힘이다. 백남준 연구의 발신지가 되고 있는 경기도 용인 백남준 아트센터 이영철 관장과 이홍관 학예연구사 등 한국 대표단은 개막식에 참석해 작품으로 살아 돌아온 백남준의 귀환을 들뜬 표정으로 지켜보았다. 이 관장은 “백남준은 동서양의 사고체계를 꿰뚫어 비디오 아트라는 작품세계로 완숙시킨 뒤 서구 문명의 교란자로 떠돌았던 예술의 칭기즈칸이었다”고 정의했다. 페키안(Paikian·백남준주의자)이라는 새 용어가 미술사학자들 사이에서 통용될 정도로 백남준에 대한 재발견과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백남준아트센터는 12월 17일부터 영국 테이트 리버풀로 장소를 옮겨 계속되는 백남준 회고전 일정에 맞춰 영문판 백남준 연구서를 펴내는 한편 국제 심포지엄을 열 계획이다. 한국 미술사학자들이 세계 미술판에 ‘백남준 전쟁’의 도전장을 던지는 역사적 순간이다. 전시는 11월 21일까지. 뒤셀도르프(독일)=글·사진 정재숙 선임기자

2010-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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